런던, 밀라노, 파리의 패션위크를 연이어 바라보면 이번 봄과 여름의 방향은 명확하다. 장식과 과잉의 시대가 끝나고, 옷이 다시 자신을 말하기 시작했다. 이번 시즌의 핵심 키워드는 ‘조용한 자신감’이다. 브랜드들은 소리치지 않고도 존재감을 드러냈고, 옷은 화려한 무대의 중심에서 한 발 물러나 공기처럼 가볍고 솔직한 감정을 품었다. 실험과 전통, 구조와 촉감의 균형이 미묘하게 섞이며 패션의 언어가 새로 쓰였다.

소재의 언어 — 공기와 질감

이번 시즌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소재의 감각이다. 런던에서는 오간자, 시스루 니트, 메시, 투명한 실크가 겹겹이 쌓였다. 옷의 구조가 사라지는 대신 천이 몸을 따라 흐르며 움직임 그 자체가 디자인이 되었다. 밀라노는 보다 깊은 밀도를 지녔다. 얇은 가죽과 부드러운 니트, 유연한 트윌을 결합해 여름에도 호흡 가능한 관능을 만들어냈다. 파리는 그 중간 지점에서 정제된 재단으로 질감의 여백을 남겼다. 샤넬과 로에베는 천의 결을 거의 보이지 않게 다듬으며 옷이 가진 ‘공기감’을 극대화했다. 소재는 더 이상 장식이 아니라 감정의 표현 수단이 되었다.

색의 균형 — 뉴트럴 위의 한 방울

SS26 컬러 팔레트는 과거 어느 시즌보다 절제되어 있었다. 베이지, 모래색, 페일 블루, 올리브 같은 중명도 톤이 기본을 이루고, 그 위에 시트러스 옐로나 차가운 핑크가 한 번씩 등장했다. 런던에서는 이 포인트 컬러가 룩 전체의 무드를 환기시키는 역할을 했다. 밀라노는 좀 더 선명한 명도 대비를 통해 구조적인 재단과 색을 대조시켰다. 반면 파리는 색의 존재감을 거의 지우고 빛과 그림자의 변화로 감정을 표현했다. 요란한 대비보다 미묘한 음영이 더 큰 힘을 가졌다. 이번 시즌의 컬러는 말 대신 공기를 남긴다.

형태의 논리 — 구조와 해체

런던에서는 퍼프 스커트와 둥근 실루엣, 과장된 어깨선이 다시 등장했다. 하지만 그 내부는 비워져 있었다. 무게 대신 볼륨만 남겨두며 실험적인 형태를 부드럽게 풀어냈다. 밀라노는 반대로 매끈한 선과 굴곡이 섞인 곡선 구조를 강조했다. 볼륨을 줄이되 재단의 방향을 틀어 움직임 속에서 형태가 달라지도록 했다. 파리는 그 모든 것을 정제해 단순화했다. 최소한의 패턴, 최대한의 비율. 절제된 실루엣이 감정의 무게를 담았다. 복잡한 장식 없이도 완성되는 미학, 그것이 SS26의 형태다.

디테일과 액세서리 — 움직임을 기록하다

이번 시즌의 디테일은 섬세하고 절제되어 있었다. 런던에서는 프린지와 체인 디테일이 가방과 슈즈로 이어지며 움직임의 흔적을 남겼다. 메탈의 광택은 낮은 채도로 눌러 복식을 과장하지 않았고, 주얼리는 빛만 남긴 채 형태를 줄였다. 파리와 밀라노의 무대에서는 구조적이고 실용적인 가방들이 등장했고, 슈즈는 스트랩의 곡선이 디자인의 중심이 되었다. 실루엣은 단순해졌지만, 디테일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작은 장식들이 옷의 리듬을 만들었다.

패션의 온도 — 세 도시의 리듬

세 도시의 패션위크는 각기 다른 언어로 같은 이야기를 했다. 런던은 여전히 실험적이었지만 더 성숙했고, 밀라노는 색과 곡선으로 관능을 다듬었으며, 파리는 단순함으로 감정을 압축했다. 서로 다른 리듬이 하나의 벡터로 모이는 순간이 있었다. 바로 ‘조용한 자신감’이다. 이번 봄과 여름의 패션은 더 이상 주목받기 위해 외치지 않는다. 대신 천천히, 확신에 찬 시선으로 자신을 증명한다. 그 침묵 속에서 패션은 다시 본질로 돌아간다.